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당계전쟁]]과 [[탕성즈]]의 몰락 ==== [[영한합작]]의 조건으로 하야한 장제스는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의 설립에 대해 "특위가 청당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굳이 이를 반대하진 않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용한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며 조건부 찬성을 표했다. 이후 장췬을 비롯한 장제스의 맹우들이 항저우로 집결하고 왕징웨이가 항저우에서 장제스와 회담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퍼져 장제스가 복귀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고 지지자들은 장제스에게 복직할 것을 권유했다. 9월 20일에는 장제스 지지자들이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정부가 이를 무력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듯 장제스 복귀를 요청하는 많은 요구가 있었으나 장제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유를 선언하고 외국 유학을 이유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일본에서 장제스는 [[다나카 기이치]] 일본 총리와 함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열어 일본의 원조를 구하려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다만 중국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쑹씨 일가의 막내딸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허락받는 데는 성공했다. 한편 친장파이며 [[후한민]]과 관계가 밀접하던 [[리지선]]이 9월 중순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당 각파의 협력을 주장했는데 그는 특히 장제스, 왕징웨이의 합작을 주장했다. 얼마 후 [[우징헝]],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등이 중대 문제를 상의해하기 위해 리지선의 상하이행을 요청함으로 장왕합작에 대한 동의를 표시했다. 이때 왕징웨이가 친공적이라면서 그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의 합작에 동의하지 않아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영한합작에 불응하여 우한 정치분회를 설립하고 특별위원회에게 도전하던 탕성즈는 9월 27일 휘하의 [[허젠]]을 안휘성 정부주석에 무단 임명한 사건 때문에 광서파, 광동파, 서산회의파, 펑위샹, 주페이더 등에게 동시에 밉보여서 10월 20일 토벌령 발표로 하남, 강서, 광동, 안휘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몰락, 11월에 하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당계전쟁]] 문서를 참조.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장제스는 11월에 귀국, 12월에 [[쑹메이링]]과 결혼식을 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